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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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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이앤케이법률사무소 작성일20-01-13 11:24 조회8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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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변호사로서 법치주의에 대해 한 번 적어볼까 합니다.

 

제 글을 자주 보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법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적성에도 안 맞고요. 하지만 그와 별도로, 얼핏 딱딱해보이는 법이 사회를 추동하는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전문적인 법 철학에 근거하여 작성되지 않았을 뿐더러, 서구와 비서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다는 점에서 다소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스팀잇 유저 분들이라면 여기서 몇 문장 정도는 재밌게 읽어주시지 않을까라는 심정에서 이 글을 포스팅합니다.

 

법치주의란 문자 그대로 법에 의한 통치를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적용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특히 국가의 운영 같이 거시적인 영역 뿐 아니라 당장 가까이 여러분의 일상생활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법치주의라는 이 짧은 단어가 가진 파급력과 힘을 명확히 아시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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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위의 지도에 적혀 있는 숫자는 뭘까요? 다른 게 아니라 IQ입니다. 한국에서 아이큐가 120이라고 하면 사실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세계 평균으로는 대단히 높은 수치입니다. 한국에서 아이큐 두 자리라고 말하면 그건 욕으로 듣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흔히 말하는 두 자리대 아이큐의 소유자도 많은 겁니다. 한국 뿐만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동아시아인들의 아이큐는 상당히 높습니다. 미국 명문 대학에서는 동아시아 출신들이 하도 입학을 많이 해서, 아예 쿼터로 제한을 해놓았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다른 인종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죠. 그런데도 동아시아 출신 입학생들의 비율은 갈수록 늘어납니다. 최근에는 이게 단순히 공부를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성과가 아니라 아시아 사람들이 머리 자체가 좋다는 연구 결과를 공공연하게 내놓은 논문도 많습니다. 높은 지능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다른 사회, 다른 문화권으로 강한 힘을 투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좋은 예이죠.

 

그런데 왜 동양 사회는 서구에게 뒤쳐지게 됐을까요? 뒤쳐졌다, 이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겠죠. 하지만 전 더 적나라한 단어도 쓸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패배입니다. 지금 중국이 G2로 뜨고 있긴 합니다만 부정할 여지 없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서구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는 아편 전쟁부터 시작해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까지 대부분 서구 사회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서 패배해왔습니다.

 

현재 저희가 입고 있는 의복부터 배우는 학문이나 사회 제도 같은 것들은 대부분 서구에서 유래되었죠. 이런 지엽적인 것들을 넘어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부분은 언어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대단히 많은 단어들은-그 유래를 찾으면 얼마나 많냐면 없던 단어가 있던 단어보다 월등히 많습니다-불과 백년 전만해도 한국어에는 전혀 없던 것들입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을 일본 언어학자들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번역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죠.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언어란 단순히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언어가 그 자체로서 의식을 형성한다, 그 사람의 언어의 한계가 곧 그 사람 세계의 한계다, 즉 극단적으로 우리는 서구인들이 그린 세계 위에서 그들의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다, 그렇게 말해도 생각보다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그럼 차라리 완전히 서구화가 되어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되었느냐, 또 그것도 아닙니다. 그랬다면 굳이 법치주의에 대해서 다시 설명 드릴 필요도 없겠죠. 결국 그 근간에 들어가면 본질적인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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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는 미국인들 기준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를 순위 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어가 수위권에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히딩크 감독이 8개 국어를 한다는 걸 듣고 깜작 놀랐는데 사실 같은 유럽 어족의 언어는 서로 배우기가 쉽습니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영어와 독일어가 갈라진 지가 채 이천년이 안 되는 걸로 추측될 정도니까요. 반면에 이 표를 통해 영어와 한국어는 거의 유사점이 없는 언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우고 여기에 막대한 금전을 쓰고 있지만 왜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아실 수 있죠. 하지만 끊임 없이 상대의 언어에 영향을 주며 배울 것을 강요하는 쪽은 당연히 한국어가 아닌 영어입니다. 서구와 동양 사회의 근간에 있는 그 차이에 있어 불이익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쪽은 서구가 아닌 우리입니다.

 

무엇이 이런 패배를 만들었는가.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총균쇠」에서 동아시아의 해안선은 복잡하지 않아서 중국과 같은 장기 중앙 집권 국가 탄생이 용이했고 그래서 서구 같은 소국들의 경쟁하는 구도에 비해 사회 전반의 창의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어서 그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는 단순히 서구가 신대륙이랑 더 가까웠고 그래서 더 빨리 신대륙의 자원을 수탈할 수 있어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죠. 하지만 제가 꼽는 동아시아 사회와 서구 사회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 강의의 주제인 법치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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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어떻게 유럽을 제패했을까요? 이탈리아인들은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상당히 왜소한 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를 포함해서 다른 유럽 세계와 명확히 구분되는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법치주의죠. 법치주의가 확립되어있던 로마는 자신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던 호전적 남성들이 거주하는 유럽을 철저하게 지배했을 뿐 아니라 지배한 세계 대부분을 자기 문화권으로 동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법은 우리가 흔히 암흑기로만 오해하고 있는 중세에도 교회법으로 이어져 그 소임을 다해왔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로켓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은 세계를 지배하는 툴로서 서구 문명의 정수이자 그 요체입니다. 사회의 발전에 매우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힘을 부여하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꼽힙니다. 바로 첫 번째. 법만큼 인간의 이기심, 그 사유재산제에 부합하는 통치 기술이 없습니다. 법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창의력을 극도로 끌어낼 수 있죠.

 

제가 구경했던 사건 중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양 회사 변호사가 피고 아줌마한테 분양 대금을 안 내서 계약이 원천 해제 됐으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여기서 법적으로 의미 있는 주장은 분양 대금을 냈는지 내지 않았는지, 만약 내지 않았다면 추후에 이 하자를 치유했는지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분양 대금을 안 냈다고 저 쪽 분양회사 사람이 욕을 했다. 내 아들 앞에서 어머니 욕을 했는데 모욕감을 견딜 수 없었다, 이 말을 반복적으로 하시더군요. 그 분의 그런 읍소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와 별도로 본 사안에서 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판결을 내리시는 판사 분은 개인적으로 제가 아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셨죠. 하지만 그 분은 고민 없이 그 아주머니의 패소를 선고했습니다.

 

민사 법원은 어떤 점에서는 수학 공식과도 같은 법 조문에 사실 관계를 대입시켜서 결론을 내는 곳이지 개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곳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법은 차가워 보이죠. 하지만 또한 대단히 효율적입니다. 1에서 1을 더했다면 2다. 개별 사람들의 스토리가 개입될 여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도 빠르고 사람들은 법이라는 툴 내에서 행동하면 이윤을 취할 수 있고 가령 도의적 비난 소지가 있을지라도 여하간 적법하게 획득한 재산이라면 법이 지켜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게 됩니다. 이기심에 기댄 개별 사람들의 이윤 추구는 사회의 혁신을 빠르게 진행시키죠.

 

법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이 같은 인간의 이기심을 도외시한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사법부의 독립성과 권위가 보장되지 않은 구 소비에트 연합이나 동아시아적 덕치는 인간의 본성을 함양 또는 계몽하여 자발적으로 공동체적 선을 이루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실제로 소비에트 체제 하의 제 일 세대는 혁명의 세대라는 자부심으로 뭉쳐 일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을 능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오래 가지 못했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이런 표현에서 보듯 법이라는 것은 이상론적인 사회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만 역사가 증명하듯 그런 사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 타당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수평적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이고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법정에는 원칙적으로 대등한 원고와 피고만이 있어야 합니다.

 

동아시아 사회, 특히 한국 사회는 이와 정확히 상반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인치(人治)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한 미술 선생님은 학생들의 미술 점수를 줄 때 습관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는 미술 점수만 보지 않는다. 학생의 인성까지 함께 본다. 얼핏 들으면 나쁘지 않은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실력보다 인성이 우선이다. 저희가 성장하면서 적지 않게 들어왔던 말이기도 하죠. 정작 그 선생님은 학생들의 인성을 제대로 평가했을까요? 제가 보왔을 때는 평가가 공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선생님 자체도 그렇게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인사고과를 인성으로 준다면 어떨까요? 인성이라는 건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입니다. 일 잘하는 김대리가 부장님과 사이가 안 좋다면 객관적인 평가가 될까요? 이것이 인치의 근본적인 약점입니다.

 

조지 워싱턴 대의 아시아 계 법학 교수인 앤디 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기계적인 방식이나 법에 호소하는 문제 해결을 싫어한다. 중국 뿐만이 아니죠. 전반적으로 동양 사회는 법에 의한 엄격한 결정보다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장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죠. 하지만, '조화' '덕' '인치' 이런 것들은 그 평가가 대단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죠.

 

제가 '인치'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강조되는 '인(人)'이 뭘까요? 보통은 나이입니다. 내가 나이가 많은 사람, 인(人)이니까 너는 나의 말을 따라야 해. 또는 학번이나 직급일 수도 있겠죠. 결과적으로 얼핏 정감 있게 들리는 인치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수직적 사회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인치'라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보다 그 사람의 캐릭터에 관점을 집중시킵니다. 물론 사람을 뽑는 데에 인성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성이란 말 하나로,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싸가지가 있다 없다는 막연한 이유로 수 많은 천재들이 도태되어 오거나 또는 조직 내에 수 많은 부조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횡행해온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반면 법치주의라는 것은 얼핏 보면 차가워 보입니다. 만약 아는 형이나 동생이 술을 마시다가 싸우고 동생이 “법대로 해.”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건 이제 둘 사이의 형 동생 관계가 끝났다는 말이죠. 한국 사람들은 소송하기를 좋아하지만 이와 별도로 법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 제가 하나 질문 드리겠습니다. 만약 어떤 여성 분이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감동의 이벤트가 끝나 결혼을 결심한 그 순간 남자가 갑자기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냅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이혼 계약서입니다. 너랑 살다보면 이혼할지도 모르니 일단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 그럼 아마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을 안 할 거니다. 싸다구를 맞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서구인들은 이런 식의 계약서를 많이 씁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쓸 때도 있고요. 막연히 차갑게 느껴지십니까?

 

법치주의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인성이나 지위가 아닌 냉엄한 법문을 통해 판단을 하기 때문에 수평적 사회구조를 창출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객관성이죠. 아는 친구가 있어서 원래 한 시간을 기다려야 처리되는 일을 바로 처리했다. 훈훈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말하는 급행료를 만들고 학연이나 지연 카르텔에 따른 인의 장벽을 쌓습니다. 또한 개인이 가진 권위에 맹종하게 되고 자연스레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 하에서 능력 위주의 객관적이고 수평적인 경쟁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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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진을 볼까요. 누구죠? 포청천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참 훌륭한 판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이 드라마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법 시스템이 매우 특출한 사람이 해당 자리를 점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설적으로 서구의 드라마가 극의 재미를 위해 변호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뿐 판사에게 비추지 않는 것은 굳이 아주 특출난 사람이 판사를 하지 않더라도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면을 보셔야 합니다.

 

뛰어난 한 개인의 능력에만 의지하는 시스템은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도덕심이나 용기를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중국 법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공통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웅담으로 알고 있는 포청천의 신화가 중국 사법 시스템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시스템임에도 포청천 같은 사람 하나가 나오면 잘 돌아 갑니다. 그래서 개혁이 오히려 늦어지게 되죠. 그리고 잘못된 시스템은 존치가 됩니다. 만약 모든 독재자가 싱가포르의 리콴유 같다면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더 나을 가능성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원님 재판. 드라마에서 포청천이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다합니다. 포청천이니까 그렇게 해도 공명정대한 판결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중국의 공산당원 판사가 공안을 끼고 누군가 죄가 있다는 전제 하에 수사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판사는 자기의 행동이 정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살벌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민주주의의 기본은 권력 기관의 상호 견제입니다. 그 근본은 삼권 분립이죠. 법원에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있는 것은 결국 대등한 당사자가 치열하게 법원에서 다투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에 가장 부합한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판사는 판결만을 내립니다. 최대한 객관성을 담보하려는 겁니다. 뛰어난 개인의 역량에게 기대는 것은 장기적인 아웃풋에서 결코 우수한 시스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굳이 포청천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간에 소장을 보내서 그 사람을 법원에 부를 수 있어야겠죠.

 

이런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갖추어졌을까요? 과연 한국의 법원은 충실히 이 같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행하고 있을지 그에 있어 의문이 남습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불과 십년 전만 해도 국내 최고라 불리던 모 로펌은 재판을 앞둔 의뢰인에게 담당 판사의 인맥도를 파워포인트로 브리핑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 판사의 사법연수원 동기, 그 중에서도 독서실 옆 자리에서 공부하던 변호사가 사건을 맡을 것이다, 그렇게 의뢰인을 안심시킵니다. 사실 옆자리였다고 사이가 좋았을지 안 좋았을지는 모르는 겁니다. 잘 안 씻어서 냄새가 난다고 싸웠다던가 오히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걸 믿고 의뢰인은 덥석 고가의 사건 수임을 맡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한국 사회 전반은 물론이요 법정에서조차 이 같은 법치주의가 명확히 실행되고 있는지는 상당한 의문이 남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법치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의 의견 수렴이 아니라 소수 리더들의 리더십으로 여기까지 왔죠. 국가가 주도가 된 경제발전과, 탁월한 창업주의 지도력 하에 성장한 대기업 그룹 집단 등이 그 예입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변화된 시대에서, 그러한 종전의 시스템이 유용한가 의문이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사회의 발전과 부의 축적이 아니라, 비법치인 사회, 소위 말하는 인정이라는 미명 하에 위계에 의한 권위주의가 횡행하고 한 개인 삶의 다양성이 위협 받는 이 사회에, 정치가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좀 더 평등한 기회를 얻고 좀 더 행복하기 위해 법치(法治)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형 동생이나 어른과 젊은이가 아니라 대등한 일대일로서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존중받는 사회, 실은 그게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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